기예르모 델토로 프랑켄슈타인 (세대폭력, 피조물연기, 고딕미학)
처음엔 그냥 팝콘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친구들이랑 극장에 들어가면서 어느 장면에서 놀라서 비명을 질러볼까 이야기하던 분위기였거든요.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극장 안이 이상하게 조용했습니다.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신작 '프랑켄슈타인'은 저를 포함해 함께 간 친구들 모두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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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프랑켄슈타인 공식포스터 |
세대폭력: 괴물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세대 간 트라우마 전이(Intergenerational Trauma Transfer)'입니다. 쉽게 말하면, 부모에게 받은 상처가 자식에게 그대로 흘러내려가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영화 속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은 냉혹한 아버지 레오폴드(찰스 댄스)에게 학대에 가까운 양육을 받고 자랍니다. 그런데 정작 빅터 본인이 피조물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아버지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처음에는 피조물이 말을 제대로 못 하고 행동이 어설프자, 빅터는 점점 실망하고 차가워집니다. 가르치기보다 벌하는 쪽을 택하고, 결국 외면해버립니다.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든 생각은 '저 박사도 피해자였구나'였습니다. 동시에 '그래도 이건 변명이 안 되잖아'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고요. 이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올라오는 영화가 요즘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델토로가 이 구조를 단순히 빅터 한 사람에게만 적용한 게 아니라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가 자식을 삼키고, 그 자식인 제우스 역시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냈듯이, 폭력의 굴레는 세대를 뛰어넘어 반복됩니다. 영화는 이 '굴레를 끊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붙들고 놓지 않습니다. 결말을 보고 나서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는, 아마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습니다.
피조물 연기: 제이콥 엘로디가 선택한 방법
제이콥 엘로디의 피조물 연기는 솔직히 제 예상을 훌쩍 넘었습니다. '유포리아'나 '솔트번'에서 보여준 냉소적인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결의 연기였거든요. 이번에 그가 구사한 건 일종의 '신체 해리(Body Dissociation)' 표현 방식입니다. 신체 해리란, 몸의 각 부위가 하나의 통합된 존재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엘로디는 허리를 기묘하게 꺾고, 고개를 갸웃하며, 팔다리가 서로 아직 친해지지 못한 것처럼 움직입니다.
이 움직임은 기예르모 델토로의 오랜 협업자인 더그 존스의 신체 연기를 연상시킵니다. 더그 존스는 '판의 미로'나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구현해온 배우입니다. 엘로디가 그 계보를 의식했는지는 모르지만, 결과물만 보면 꽤 비슷한 인상을 줍니다.
더 인상적인 건 눈빛입니다. 잔혹한 행동을 하는 장면에서도 그의 눈은 분노보다 혼란과 슬픔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저는 그 눈빛이 자꾸 생각나서 집에 와서도 한참 멍하게 있었습니다. '그냥 친구가 갖고 싶었을 뿐인데'라는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더라고요. 반면 빅터를 연기한 오스카 아이작은 매우 효과적으로 비호감을 만들어내는데, 그 연기가 너무 설득력 있어서 오히려 영화의 감정 균형이 피조물 쪽으로 크게 기울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보는 시각이 갈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프랑켄슈타인 영화의 역사에서 피조물 연기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궁금한 분들은 영국영화협회(BFI)의 프랑켄슈타인 영화 목록을 한번 훑어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보리스 칼로프부터 지금까지, 각 시대가 '괴물'을 어떻게 다르게 해석했는지 흐름이 보입니다.
고딕 미학: 공포가 아니라 슬픈 동화
'고딕 미학(Gothic Aesthetics)'이란, 어둠과 죽음, 퇴락한 아름다움을 통해 감정적 강렬함을 만들어내는 예술적 스타일입니다. 델토로는 이번 영화에서 이 미학을 피와 내장으로 가득 채우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아름답게 만들어냈습니다. 음산한 성벽, 핏빛으로 물든 도시의 거리, 얼어붙은 전장 위에서 멈춰선 말의 형상, 그 모든 장면이 끔찍하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한 장면은 피조물이 처음으로 태양빛을 경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극장 안이 잠깐 완전히 조용해질 정도였는데, 그 신기해하는 표정이 너무 순수해서 뒤에 벌어질 일들을 알면서도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미아 고스가 연기한 엘리자베스 하를란더도 그 장면들과 어우러져 독특한 존재감을 발휘합니다. '맥신'이나 '서스페리아'에서 보여줬던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이 영화의 색깔과 잘 맞아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델토로는 이 영화 곳곳에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숨겨두었습니다. 만화가 버니 라이트슨의 '프랑켄슈타인' 삽화에서 가져온 피조물 디자인, 영화 초반 시체 되살리기 장면에서 살짝 느껴지는 '바탈리언'의 그로테스크한 유머까지. 이 영화가 단순한 리메이크가 아니라 한 감독의 20년 된 애정이 담긴 작품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부분들입니다.
영화를 공포물로 분류할 것인가, 고딕 로맨스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뉠 수 있습니다. 피와 잔혹한 장면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무게 중심은 공포보다 비극에 더 가깝습니다. 델토로의 2015년작 '크림슨 피크'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영화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이 감정적인 깊이에서는 조금 더 나아간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용서와 구원: 이 영화가 결국 하려는 말
메리 셸리의 원작 소설에서 빅터와 피조물에게 행복한 결말은 없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프랑켄슈타인'을 만들고 싶어 했던 델토로도 그 결말을 무리하게 바꾸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원작에 없는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굴레를 끊는 것이 가능한가?'
영화는 두 개의 시점으로 나뉘어 전개되는 구조를 택합니다. 이 '이중 시점 구조(Dual Perspective Narrative)'는,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게 함으로써 관객이 어느 한쪽의 손만 들어주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빅터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가고, 피조물의 시점에서 보면 또 그쪽이 맞습니다. 이 구조 덕분에 영화 내내 단순한 선악 구도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델토로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주제를 정리해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자동으로 자식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 의해 반복된다.
- 피조물(창조된 존재)이 나쁘게 변하는 건 본성이 아니라 환경과 관계에서 비롯된다.
- 속죄는 상대방을 위한 것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 용서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선택이다.
이 네 가지를 2시간짜리 영화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메리 셸리의 원작이 프로젝트 구텐베르크에서 무료로 제공되고 있으니, 영화를 보기 전후로 원작을 읽어보시면 델토로가 어디서 얼마나 달라졌는지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가 모두에게 완벽한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크리스토프 발츠가 연기한 하를란더 역할은 분량 대비 존재감이 아쉽고, 오스카 아이작의 빅터가 지나치게 비호감으로 치우친다는 느낌이 든다는 시각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에게는, 단순한 괴물 영화 이상의 여운을 오랫동안 남긴 작품이었습니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받아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어떤 장면에서 예상치 못하게 울컥할 수도 있습니다. 극장에서 보고 나서 혼자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영화는 오랜만이었습니다.
--- 참고: https://kr.ign.com/frankenstein-2025/13994/review/giyereumo-deltoroyi-peurangkensyutain-rib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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