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리뷰 (밤샘관람, 이병헌, 박찬욱)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금요일 밤, 약속이 취소되면서 갑자기 비어버린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 고민하다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였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냥 한 편 때우려고 틀었는데, 결국 해 뜰 때까지 눈을 못 뗐습니다. 취업난과 구조조정이 일상이 된 지금, 이 영화가 왜 지금 나왔는지 보고 나서야 이해했습니다.

여자 2명, 남자 3명이 앞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
영화 어쩔수가 없다 공식포스터

밤새 영화를 본 사람이 먼저 말해드립니다

배달 앱으로 치킨을 시켜놓고 방 불을 다 끈 채 모니터 불빛만 남겨뒀습니다. 그냥 1화만 보고 자야지 싶었는데, 첫 번째 결정적인 장면이 지나가는 순간 그 생각은 완전히 날아갔습니다. 주인공이 처음 사고를 치는 그 둔탁한 소리가 스피커를 뚫고 나오는데, 저도 모르게 숨을 턱 하고 참았습니다.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리고 눈만 내놓고 화면을 봤습니다. 원래 쫄보라서 무서운 걸 잘 못 보는데도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되는 힘이 있었습니다.

새벽 3시쯤 됐을 때, 창문 밖에서 오토바이가 '부아앙' 하고 지나갔습니다. 공교롭게도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경찰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이랑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서 잠깐 일시정지를 누르고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습니다. 혼자 보는 사람이라면 긴장되는 장면에서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멘탈 관리를 미리 해두시길 권합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마지막 화를 다 봤고, 식어버린 치킨은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먼저 드리는 이유는, 이 영화를 어떤 환경에서 보느냐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햇빛 쨍쨍한 낮에 스마트폰으로 힐끗힐끗 보면 이 영화 특유의 쫄깃하고 무거운 맛이 전혀 살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불을 끄고, 혼자서, 이어폰이나 스피커 볼륨을 좀 높여서 보시길 강하게 권합니다.

이병헌이 만든 '공감 가는 살인마'의 무게

이 영화의 주인공 만수는 제지 업계에서 25년을 일하다 미국 투자자들의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남자입니다. 여기서 제지 업계라는 설정이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극도로 전문화된 아날로그 산업, 즉 디지털 전환과 AI 자동화의 파도에 가장 먼저 잠식당하는 분야를 상징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AI 자동화란 기계가 사람의 반복 업무를 대신하는 것을 넘어, 전문 지식 자체를 대체하는 흐름을 뜻합니다. 만수가 평생 쌓아온 기술이 하루아침에 쓸모없어지는 공포, 그게 지금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이 느끼는 감각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이병헌의 연기는 제가 직접 보고 나서야 왜 이 배역이 그여야 했는지 이해했습니다. 그는 만수를 악당으로도, 완전한 피해자로도 만들지 않습니다. 그저 한 인간이 자존감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손예진이 연기하는 아내 미리 역시 인상적입니다. 그녀는 치위생사로 취직하거나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자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인물입니다. 두 사람의 호흡은, 결혼 이전의 삶을 직접 보여주지 않아도 오랜 역사가 축적된 관계처럼 느껴졌습니다.

영화가 탁월한 지점은 만수의 처지에 공감을 끌어내면서도 그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는 집을 잃거나 밥을 굶을 위기에 처한 게 아닙니다. 중산층의 생활 방식과 자신이 쌓아온 커리어에 대한 집착이 그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이 차이를 흐리지 않고 끝까지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단순한 장르 오락물이 아닙니다.

박찬욱 연출이 만든 '시대정신'의 질감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조명, 색감, 구도, 배경을 통해 감독이 의도를 전달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 느낀 건 그 미장센의 밀도였습니다. 칙칙하고 노란 가로등 불빛 같은 색감이 영화 전체를 감싸고, 배경음악은 심장 박동처럼 쿵쿵거립니다. 이게 스토리의 무게와 너무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어려운 연출 이론을 몰라도, 보는 내내 "이거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피부로 왔습니다.

이 작품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1997년 소설 『도끼(The Ax)』를 원작으로 합니다. 원작 소설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도덕성을 잠식하는지를 다룬 작품으로,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는 범죄 소설계의 거장으로 평가받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고전적인 주제를 2020년대 한국의 구조조정 현실과 AI 대체 공포에 맞게 재배치했습니다. 덕분에 원작의 씁쓸한 부조리는 더 날카로워졌습니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단톡방에서 친구들에게 "무조건 봐라"라고 도배를 했는데, 평소 좀비물이나 가벼운 코미디만 보던 저한테 이런 묵직한 장르가 이렇게 흡입력 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해준 경험이었습니다. 장르의 경계를 흐리면서도 관객에게 확실한 만족을 주는 방식, 이건 박찬욱 감독 특유의 기술입니다. 웃기고, 우울하고, 긴장되는 감정이 동시에 오는 영화가 흔하지 않습니다.

밤샘관람 전에 이것만 챙기세요

저처럼 충동적으로 밤을 새울 계획이 아니더라도,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몇 가지를 미리 알아두면 좋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하면서 느낀 것들을 정리해봤습니다.

  1. 불을 끄고 혼자 보세요. 화면의 색감과 음향이 환경에 따라 몰입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밝은 낮보다 어두운 밤이 훨씬 유리합니다.
  2. 간식은 가볍게 준비하세요. 긴장되는 장면이 예고 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치킨처럼 먹는 데 집중해야 하는 음식은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저는 결국 다 식혀서 다음 날 아침에 먹었습니다.
  3. 영화 전후에 조용한 시간을 두세요. 보고 나면 머릿속에서 장면들이 한동안 맴돕니다. 바로 다른 걸 틀기보다 잠깐 여운을 두는 게 이 영화를 더 오래 기억하게 해줍니다.
  4. 러닝타임이 다소 길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을 미리 감안하세요. 중반 이후 일부 구간에서 호흡이 느슨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말을 향해 가면서 그 여백이 의미 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카타르시스란 극적 긴장이 해소되면서 관객이 감정적 정화를 경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영화는 나쁜 사람들이 제거될 때 속이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주면서도, '그래도 사람을 죽이는 건 범죄인데'라는 찝찝함을 동시에 남깁니다. 그 불편한 감정이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2003)부터 '헤어질 결심'(2022)까지 이 불편함을 관객에게 정면으로 던져온 감독입니다. '어쩔수가없다'는 그 계보의 가장 최근 작품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최고작들이 남기는 압도감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이 주제를 이 방식으로 풀어낸 영화가 또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취업난과 구조조정, AI 대체에 대한 불안이 일상이 된 지금, 이 영화가 건드리는 것들은 픽션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빨리, 가능하면 혼자, 비 오는 밤에 보시길 권합니다.

--- 참고: https://kr.ign.com/no-other-choice/14146/review/eojjeolsugaeobsda-rib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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