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걸 리뷰 (밀리 앨콕, 빌런, 로보)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 영화에 지나치게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이 슈퍼히어로 장르를 만난다는 소식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쿵 내려앉을 만큼 설렜으니까요. 그 기대감을 안고 들어간 상영관에서 제가 느낀 건, 짜릿함과 허탈함이 번갈아 치고 빠지는 묘한 감각이었습니다. 좋은 재료를 잔뜩 쌓아두고도 끝내 완성된 요리를 내놓지 못한 느낌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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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슈퍼걸 공식포스터 |
밀리 앨콕이라는 무기, 그러나 텅 빈 서사
영화 슈퍼걸에서 제가 가장 먼저 주목한 건 단연 밀리 앨콕이었습니다. 앞서 슈퍼맨에서 카라 조엘 역으로 깜짝 등장했을 때부터 첫인상이 굉장히 강렬했거든요. 그 인상이 솔로 무대에서도 이어질지 반신반의했는데, 제가 직접 스크린에서 확인하고 나니 그 걱정은 기우였습니다.
카라 조엘이라는 캐릭터는 소위 비자발적 영웅(reluctant hero), 즉 영웅이 되기를 거부하며 끝까지 발버둥 치는 인물입니다. "난 신경 안 써"를 외치면서도 결국 위험 앞에서 몸을 내던지는 구조인데, 이걸 매력적으로 연기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화면 속 인물이 무심하면 보는 사람도 덩달아 무심해지거든요. 그런데 밀리 앨콕은 이 까다로운 줄타기를 유쾌하게 해냅니다. 진짜 트라우마의 무게를 짊어진 연기였고, 구제불능인 채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특히 데이비드 코런스웻의 슈퍼맨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들에서 저도 모르게 눈이 커졌습니다. 낙관적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슈퍼맨과,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슈퍼걸이 빚어내는 케미스트리는 정말 눈부셨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 둘의 투샷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후속작이 얼른 나왔으면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문제는 밀리 앨콕이라는 배우가 아니라, 그녀에게 주어진 각본입니다. 카라 조엘의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인물이 이야기 안에서 겪는 변화와 성장의 곡선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시작될 때와 끝날 때 그녀는 거의 똑같은 행동을 반복합니다. 가족을 잃은 어린 소녀 루시 마리 놀(이브 리들리 분)을 위험에서 지키려는 모습이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구조입니다. 오히려 루시 마리 놀의 여정이 카라 조엘보다 훨씬 완성도 있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주인공보다 조연의 서사가 더 탄탄하다는 건, 각본 차원의 문제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압도적인 비주얼, 그리고 낭비된 빌런
영화의 세계관을 채우는 외계인 디자인과 특수 분장, 의상의 퀄리티는 그야말로 최상급입니다. 흙먼지 날리는 황량한 디스토피아 배경은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즉 문명 붕괴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 장르 특유의 분위기를 잘 살려냈습니다. 매드 맥스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 안에 스타워즈의 모스 아이슬리 칸티나 같은 단골 주점 장면까지 녹여냈는데, 제가 직접 스크린에서 보니 이 부분만큼은 시각적으로 정말 즐거웠습니다.
메인 빌런인 노란 언덕의 크렘을 연기한 마티아스 스후나르츠의 외형은 압도적입니다. 얼굴에 박힌 구슬, 신체에 이식된 기계 장치, 말을 하기 위해 눌러야 하는 기괴한 빨간 버튼까지, 이 모든 요소가 합쳐져서 매드 맥스의 썬더돔에 세워도 위화감 없을 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완성합니다. 처음 스크린에서 그 캐릭터를 마주했을 때 저도 모르게 "오" 하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 멋진 외형을 가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주변 인물들이 그를 두려워하는 대사 몇 마디 외에, 그가 왜 무서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결국 노란 언덕의 크렘은 알맹이 없는 겉멋 든 캐릭터로 남아버립니다. 비주얼 임팩트(visual impact), 즉 첫눈에 강렬한 인상을 주는 힘은 분명히 있는데, 그 힘을 받쳐줄 서사적 무게가 전혀 따라오지 않는 상황입니다.
제 경험상, 좋은 빌런은 얼마나 강한지보다 얼마나 설득력 있게 위협적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크렘은 전자만 갖추고 후자를 완전히 놓쳤습니다.
로보의 등장, 그리고 남은 물음표
제이슨 모모아가 분한 로보가 화면에 나타나는 순간, 극장 안 분위기가 확 달아올랐습니다. 특수 분장과 페이스 페인팅으로 무장한 그 실루엣은 위압적이었고, 시가를 질겅거리는 모습은 팬서비스(fan service), 즉 팬들의 기대와 바람에 부응하는 연출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개그성 대사들도 재미있었고, 극장 안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저는 계속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굳이 로보가 나올 필요가 있었나?" 카라 조엘과 마주치는 단 한 씬은 대놓고 재촬영의 기운이 물씬 풍겼고, 그가 극의 흐름에 유기적으로 녹아든다는 느낌도 없었습니다. 카라 조엘의 성장을 자극하는 조력자도 아니고, 그저 같은 악당 무리를 우연히 쫓고 있었을 뿐입니다.
결국 이 영화에서 로보가 기여한 바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몇 마디 찰진 개그 대사로 극장 분위기를 띄웠습니다.
- 불사신 안티히어로라는 설정으로 카라 조엘의 행동에 명분을 부여했습니다.
- 팬들에게 "로보가 DC 유니버스에 있다"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세 번째가 가장 솔직한 이유에 가깝습니다. 확장 유니버스(Extended Universe), 즉 단일 세계관 안에서 여러 영화와 캐릭터를 연결하는 구조 특성상 미래를 위한 씨앗을 뿌리는 건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 씨앗이 지금 이 영화의 극적 흐름을 방해하면서까지 심어져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아쉬움이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은 분명히 재능 있는 연출가입니다. 아이, 토냐나 크루엘라처럼 뻔해 보이는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온 전적이 있습니다. 그 감독이 슈퍼히어로 장르와 만났을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기대했던 만큼, 영화가 끝내 자신만의 리듬을 찾지 못하고 표류한 느낌은 더 진하게 남습니다. 훌륭한 재료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흩어져 있는 영화, 슈퍼걸에 대한 저의 솔직한 감상입니다.
슈퍼걸은 밀리 앨콕의 연기와 슈퍼맨과의 케미스트리만으로도 극장에 갈 이유가 충분한 작품입니다. 다만 그 두 가지가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기엔 각본과 빌런 활용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새로운 DC 유니버스에 기대를 걸고 있다면 직접 보고 판단하시길 권하지만, 완성된 서사보다 분위기와 비주얼을 즐기는 마음으로 가시면 조금 더 편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참고: https://kr.ign.com/supergirl-2026/15178/syupeogeol-ribyu.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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